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기슭에 자리한 서계종택(西溪宗宅).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 서계(西溪) 박세당(1629~1703)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머물렀던 고택이다. 수락산 끝자락 넓은 대지에 자리한 고택에 들어서면 먼저 400년 넘은 은행나무 고목이 반기고, 그 뒤로 은행나무와 어울리는 기품 있는 모습의 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저절로 눈길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고택 분위기이다. 6·25전쟁 때 대부분 불에 타고 지금은 바깥 사랑채만 남아 있지만, 규모도 크고 멋진 사랑채 하나만으로도 여느 고택 못지않은 멋과 기품을 보여준다. 특히 사랑채 앞에 보기 드물게 넓은 잔디 마당이 펼쳐져 있어 일반 주택과는 다른 각별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앞으로는 도봉산의 멋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대지는 3천평 정도. 사랑채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 반 규모로 툇마루가 나 있고 공부방과 침방, 강학 공간, 사랑마루와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앞마당의 은행나무는 서계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높이가 20m에 이르고, 둘레가 6.5m다. 이 서계종가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지금도 서계 불천위 제사상에 오르는 특별한 음식이 있다. 생간납이다. 돼지고기 편육과 잡채도 이 종가만의 특별한 제사음식이다. 서계종가에는 불천위 조상 두 사람이 있다. 서계 박세당과 서계의 부친인 하석(霞石) 박정(1596~1632)이다. 불천위는 나라나 유림에서 그 삶과 가르침을 본받을 만한 훌륭한 인물에 대해 4대 봉제사가 끝난 후에도 후손과 후학들이 제사를 지내며 영원히 기릴 수 있도록 인정한 인물의 신위를 말한다. 서계종가는 2위의 불천위 선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2위의 신위에 대한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고 있다. 제사 날짜는 후손들이 참석하기 편리하도록 중양절(음력 9월9일)로 했다가 다시 한글날(10월9일)로 바꿔 지내왔으나, 지금은 개천절(10월3일)에 지내고 있다. 이 불천위 제사상에 옛날부터 변하지 않고 오르는 음식이 바로 생간납이다. 다른 가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제사 음식이다. 생간납은 소 간과 천엽을 날것으로 올리는데, 배와 함께 사용한다. 천엽은 소금을 넣고 깨끗하게 씻어 제기 길이로 썰어 두고, 간은 마른 수건으로 닦아 역시 제기 길이로 썰어 준비한다. 배도 껍질을 깎아 같은 길이로 채 썬다. 천엽을 펴고 배를 그 위에 놓은 뒤 김밥 말듯 돌돌 만다. 간도 마찬가지로 말아 제기 양쪽에 담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창호지를 동그랗게 잘라 얹고 그 위에 소금을 놓아서 올린다. 간납(肝納 또는 干納)은 제사에 쓰이는 전을 말하는데 간이나 천엽, 생선 등을 기름으로 지져 만든다. 누르미라고도 하고 경기도 지방에서는 ‘갈랍’이라고 한다. 서계종가는 이런 일반적인 지진 간납이 아니라 날것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김인순 종부는 생간납이 제사상에 오르는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시집온 지 35년이 되었지만 제사 음식을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지 그 내력이나 이유를 물어본 적이 없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쉽습니다. 그 내력이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생간납은 불천위 선비는 선비 중의 선비인 ‘혈식군자(血食君子)’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한 제사는 ‘혈식(血食)’, 즉 날것을 올리는 데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생간납과 함께 불천위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으로 돼지고기 편육이 있다. 이 편육이 제사상에 오르는 이유도 정확히는 모른다고 했다. 돼지 목살을 덩어리째 찬물에 담가 한 시간 정도 핏물을 뺀다. 그리고 물과 술, 간장, 다진 마늘, 다진 생강, 후추 가루 등을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핏물 뺀 고기에 양념장을 끼얹어 2시간 정도 재워 두었다가 그대로 냄비에 담아 삶는다. 고기가 충분히 익으면 건져 물기를 빼고 식혀서 얇게 저며 썰어 제기에 담아 올린다. 잡채도 제사상에 오른다. 당면과 쇠고기, 표고버섯, 당근, 양파, 파, 시금치, 황백 지단을 사용한다. ◇서계 박세당 노장사상 심취 조선후기 대표 실학자 고향서 농사지으며 農書 ‘색경’ 저술 자손에 사치·허례허식 경계하라 주문 서계 박세당은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했으며, 성균관전적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 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의정부시 장암동)으로 물러났다. 그 뒤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태유(泰維)와 둘째 아들 태보(泰輔)를 잃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 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별세 때까지 홍문관부제학, 호조참판, 공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등의 많은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던 시기를 살았던 그는 이러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며 사회 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사상적 자주 의식을 토대로 학문과 경륜을 펼쳤다. 학문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당시 통치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 박세당은 노장 사상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려는 입장이었는데, 그는 도가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스로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도가사상을 민중중심적이라고 보았다. 이런 그의 학문은 자유분방하고 매우 독창적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명분론보다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실학사상을 드러냈다. 박세당은 석천에서 농사 지으며 은거한 지 10년 만인 1676년 귀중한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을 저술해 남겼다. 박세당의 실학자다운 생각은 자신이 68세 때 자손들에게 남긴 ‘계자손문(戒子孫文)’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이 경계의 글에서 ‘자신의 장례를 간단히 치러 줄 것, 3년 상식(上食)을 폐지할 것, 일상 만사에 조심하여 명을 단축함이 없도록 근신할 것, 제사음식은 사치하지 않고 형편에 맞게 절약할 것, 논어의 말씀대로 충(忠)과 신(信)을 행할 것, 형제간은 동기간이니 우의를 돈독히 하여 집안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늘 어진 형제관계를 유지할 것 등’을 주문했다. 특히 장례나 제사상 차림에 사치와 허례허식을 개선할 것을 구체적으로 주문하며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동요되지 말고 대대손손 지킬 것을 당부했다. 특히 3년 상식(빈소의 제상에 올리는 음식)을 금할 것을 주문하면서 ‘비록 나를 위해서라도 훈계를 어겨 제사를 지낸다면 귀신이 있더라도 어떻게 너희의 밥을 흠향하겠느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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