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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의 ‘조선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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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강화도 조약의 쓰라린 역사를 지닌 강화산성2022-11-0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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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사적 제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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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강화산성은 서문과 남문을 연결하는 선을 기준으로 하여 북산과 남산 2개의 산으로 구분되며 북산에는 북장대가 남산에는 남장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남장대만이 복원된 상태이다.

11KM로 저체 탐방시간은 4~5시간 소요되며 동문,북문,서문,남문의 4개문과 암문 2개소가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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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문

강화산성의 트레킹은 남문에서 시작했다. 강화도 고려궁 성곽길은 강화 나들길 15코스의 일부로 산성 남문에서 출발해 남장대와 서문,북문과 북장대터를 거쳐 동문에 이른는 11KM의 도보길 중 하나입니다.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도성으로 쌓은것으로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었다. 내성은 1259년 몽골에 의해 헐린후,조선시대에 돌로 다시 쌓았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다시 파괴하여 조선 숙종 3(1677)에 크게 넓혀 고쳐 쌓았다. 강화산성 내성은 동서남북으로 난 대문 4,비밀통로인 암문 4, 물이 흐르는 수문 2개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남장대와 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강화산성은 둘레가 7,122M이며, 안파루(남문) 첨화루(서문) 진송루(북문)망한루(동문)

4대문과 암문,수문,장대등의 방어시설이 복원되어 있다.

우선 남문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파루라 이름지어진 남문과 남장대를 향해서 언덕을 오른다. 산성들이 다 그러하듯 산 정상 주위에 성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언덕길은 어쩔 수 없다. 숨차게 올라야하는 곳이 여러군데 있으나 강화도 전경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걸으며 당시 어렵게 쌓았을 조상들의 노고를 생각해본다. 남문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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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천장에 그려진 봉황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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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성벽

고려때 몽골에 쫓겨 여기 강화도까지 내려온 임금과 정부조직들 여러성들에서 많은 군인들이 몽골과 싸우며 옮겨온 수도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결국 패하며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하며 역사의 치욕을 남기고 있다.

옛 역사를 생각하며 언덕길을 여러번 오르다보니 남장대에 이른다. 높은곳에 위치하며 군사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장군의 지휘소라고 한다. 날씨가 좋은 때에는 북쪽으로 개성시,동남쪽으로 문수산과 김포한강신도시 서쪽으로는 봄에 화려하게 산을 장식하는 고려산을 볼 수있다. 넓은 산 벌판에 세워진 남장대에서 산성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남암문이 나온다.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암문으로 나무문이 세워진 문루 자국도 볼 수 있다. 강화산성에는 4개의 암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헐리고 남 암문만 남아 있다. 암문은 비상시 탈출구이기도 하며 전시 때 식량 등을 나르는 임시 문이며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구원요청이나 적을 역습할 때 이동통로로 사용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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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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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루에 설치되었던 자국

 

남 암문에서 산길을 따라 오른쪽 길을 가게 되면 나들길과 연결되고 산성을 따라 내려가면 서문으로 향할 수 있다. 산성의 끝이 위험해서 통행이 불가하며 낙엽 쌓인 산길을 택하여 걷다보면 서문에 이르게 된다.

서문 삼거리 쪽에 강화 석수문이 있고 석수문은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위에 설치하였던 아취형 수문으로 조선 숙종 37(1711)강화 내성을 쌓을 때 설치하였다고 한다. 서문은 현재 교통을 위해 잘려 있지만 당시는 물이 흐르는 동락천을 따라 첨화루라 이름지어진 서문이 축조되어 있다. 첨화루는 아름다움을 본다라는 뜻으로 서문 천장에는 한국 호랑이가 근엄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서문 남쪽으로는 연무당 옛터가 있는데 강화 유수부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워진 조련장으로 이곳에서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장소이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며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일본에 인천,부산,원산을 강제 개항당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 조약으로 치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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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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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천을 따라 수문이 설치되어 있는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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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천정에는 호랑이 그림이 새겨져 있다

 

서문에서 북문으로 가는 길은 100M정도의 산성만 보일뿐 복원된 성곽이 끊기게 되는데 개인소유의 땅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곳을 지나면 자연상태 그대로의 산성을 만나게 된다. 북문은 진송루라 이름지어져 있으며 원래 누각이 없었지만 조선 정조 7(1783) 강화 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웠으나 전쟁으로 부서지고 1977년 복원된한 것이다.북문은 북산에 위치하여 있고 복원이 안된 북장대터가 있으며 북장대터에서 바다쪽을 조망하면 북한지역의 개풍군이 한눈에 다가오면서 북한이 이리도 가깝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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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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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풍길 북문

강화산성은 서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적당한 자리에 위치하여 산성아래에서 올라오는 적들의 동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으로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북문 천장은 다른 문과는 달리 그림이 없은 단순한 문으로 가을에 가본 북문 주변은 은행나무들로 노랗게 물들여져 가을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동서남북 문이 다 복원되어 있지만 아직까지 문과 문을 연결하는 성터는 완벽하게 복원이 안되어 있는 상태라 이것이 복원되면 좋은 관광지이자 후손들에게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현장이 될 것이다.

북문까지 다 탐방한후 아래로 내려오면 고려궁지, 용흥궁,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천주교 강화성당과 함께 성지인 진무영성지를 만날 수 있다.

 

*남문

江華山城 南門1711년 건립되었으나 1955년 폭우로 허물어져 1975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육축부 위에 지어진 문루로 정면 3, 측면2칸이다. 창호는 모두가 판문으로서 방어용으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숙종 37(1711)에 서문과 함께 당시 강화 유수 민진원이 세우고 남측면 2층 누각 앞쪽으로 江華南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북측으로 晏波樓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1975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쓴 것이다.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남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었던 4대문 중 하나다. 문 천장에는봉황이 그려져 있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담하고 시원스런 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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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성벽

남문은 출입구가 4.0*4.5*7.5m이며 성문 전체 크기는 길이가 20m, 높이가 5m, 여장의 높이는 1m이다. 남문에서 산 방향으로의 여장은 복원되어 있지 않고 석벽만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석벽은 길이가 24m, 높이가 3.4m, 폭이 1m이다. 문에서 도로 방향으로 36m의 석벽을 복원하였다. 0.9*1.0m의 여장을 복원하였는데 이곳에 사용한 개석은 38*91*14cm이고 , 총안은 28*31cm이다.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도성으로 쌓은것으로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었다. 내성은 1259년 몽골에 의해 헐린후,조선시대에 돌로 다시 쌓았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다시 파괴하여 조선 숙종 3(1677)에 크게 넓혀 고쳐 쌓았다. 강화산성 내성은 동서남북으로 난 대문 4,비밀통로인 암문 4, 물이 흐르는 수문 2개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남장대와 북장대가 있었다.

 

 

*남장대(南將臺)

장대는 전쟁시 군사 지휘에 용이한 곳에 지은 장군의 지휘소이다. 규모가 크고 중요한 성곽에 두어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을 수행하였다. 강화산성은 1232년 고려시대 몽공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최우가 1234년 각 도의 도민과 장정을 징발해 내성.중성.외성으로 구분해 축조하고 그 안에 궁궐과 백사(百司)의 건물을 개성의 것과 비슷하게 건립하였다.

둘레 7.1km 의 강화산서에는 남산과 북산에 각각 남장대와 북장대 그리고 서문 안에 서장대가 있었으나 모두 허물어진 진 것을 2010년 남장대만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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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남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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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으로 가는 성벽 길

*남암문(南暗門)

암문은 성곽에 포함된 시설로 문루를 세우지 않는 비밀 출입통로이다.

전시상황에는 성안에 필요한 물품 등을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극비리에 구원을 요청하거나 적을 역습할 때 이동 통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강화산성에는 4개의 암문이 있었으나 모두 헐리고 남쪽에 해당하는 남암문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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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암문의 성벽


*서문

서문은 숙종 37(1711)당시 강화 유수를 지냈던 민진원이 세우고 첨화루(瞻華樓)로 이름지었다. 그 뒤 낡아서 무너진 것을 정조 20(1796)에 유수 김이익이 다시 고쳐 세웠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수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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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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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당지(鍊武堂址)

조선 고종 7(1870)에 창건된 연무당은 지금의 상시장 군 농협 자리 서쪽에 있었는데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 서문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고종 13(1876)강화도 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로 이곳에서 체결된 강화도 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인천,부산,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과거사를 잊지 않기 위하여 비를 세우고 민족 자주의식을 드높이 간직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북문

高麗宮址 좌측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약 400m를 가면 관청리와 대산리의 경계지점인 北山의 북문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북문의 앞부분은 鎭松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문루로 벽이 없는 채로 지어져 방어용 이라기보다는 관망용으로 지어진듯하다. 현재의 북문은 1976년 복원한 건물이며 강화산성 서문과 같이 프리케스트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워졌다. 초익공으로 공익공 형식을 하고 있으며 협칸에 비해 어칸의 폭이 매우 넓으며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다른 문에 비해 규모가 작으며 지붕은 유일하게 우진각 지붕형태를 보인다.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북문은 본디 바로 아래 고려궁터의 든든한 보호막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로써 강화도천도(1232)한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축조한 내성에 연결되었던 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토성이었던 당시의 성은 개경 환도때 헐리고 조선 초에 개축하였다. 그 뒤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괴된 것을 숙종37년에 석축으로 완성하였다. 이때까지 문루는 없었다. 정조 7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했으며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단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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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북문의 출입구는 2.9*2.5m이고 문 전체의 크기가 11m이다. 문에서 북장대 방향으로 42m의 성벽을 복원하였으며 서문 방향으로 50m의 성벽을 복원하였다.진송루라 이름 붙여진 북문은 사적 제 132호 강화성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 숙종 3(1677)에 강화 유수 허질이 전면을 돌로 쌓고 후면은 흙으로 개축 확장하기 시작하여 1711년 숙종때 강화유수 민진원이 34년만에 완성하였는데 주위가 1,947M이다.

북산에 위치하며 북장대가 위치하던 곳으로 아직 복원이 안 된 상태로 터만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북쪽을 조망하면 북한 개풍군이 한눈에 들어오며 북한이 이리도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

*북장대터

2010년 남장대만 북원되고 2011년에는 북장대터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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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이 안된채 터만 남아있는 북장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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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장대터에서 바라본 북한 개풍군

*동문

동문의 이름은 망한루(望漢樓)20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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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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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천장에 새겨진 용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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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동문 성벽 


##강화산성#북문#남문 #강화산성서문#강화산성 남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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