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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의 ‘조선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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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하남 이성산성<2>2021-08-09 17:12
작성자

이성산성

명칭 (한자): 하남 이성산성 (河南 二聖山城)

유형분류유적건조물

종목 및 지정번호사적 제422

지정구분국가지정문화재

http://naver.me/xpPp1F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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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산성은 오래전부터 학계에 주목을 받아온 삼국시대 산성으로
1985년 한양대학교 박물관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1986년부터 2010년까지 12차례의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00916일 성곽을 포함한 성내 전 지역이 사적 제422호로 지정되었다.

 

이성산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배후의 평야 지역을 방어하고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성산성은 1986년부터 20년간 12차례의 발굴을 통해 건물터와 문터·성벽·저수지가 조사되었다. 건물터는 총 11동의 건물터가 노출되었는데, 장방형건물터가 5, 부석식 건물터와 9각 건물터가 각 2, 8각 건물터, 12각 건물터가 각 1동씩이 조사되었다. 그러나 성내에는 발굴조사된 11동의 건물터들 이외에도 여러 개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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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산성 건물의 특징은 다각형 건물이 많다는 점인데, 특히 아직까지 보고된 적이 없는 9각 건물을 비롯하여, 12각이라는 독특한 건물도 있다. 건물의 면적은 장방형건물의 경우 80~90평에 달하는 대형 건물이며, 다각형건물들은 20~30평 내외이다. 초석은 주변에 많이 있는 화강편마암을 이용했으며 다듬지 않은 자연석에 가까운 형태로 사용했다. 또한 부석식 건물은 내부에 벽을 세우기 위한 골을 만들어 칸을 나눈 구조를 갖고 있어 일종의 창고시설인 것으로 판단된다. 문터와 성벽은 함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남문터와 동문터 및 주변 성벽 일부가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이성산성의 성벽은 2차에 걸쳐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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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는
2개가 조사되었는데, 남문터의 저수지는 산성 축조 당시 함께 만들어졌다. 그러나 상류의 토사가 급격히 흘러내려 저수지가 금방 메워지자, 그 자리를 다시 파낸 후 저수지를 다시 만들었다. 땅을 파고 진흙을 발라 돌을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규모는 평면 18×27m, 깊이 2.3m 정도이다. , 산성의 가장 중간부분이면서 대형 건물터가 많이 모여 있는 C지구에 있는 저수지는 21×15m 정도 규모로 네 벽을 다듬은 돌로 쌓아 올렸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이성산성은 발굴조사 초기에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백제가 아닌 신라 말기~통일신라기에 주로 사용되었던 고대산성이며, 한강유역을 둘러싼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주요 격전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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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산성의 총 둘레는
1,665m로서 삼국시대의 성곽 중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해발 209.8m인 주봉을 중심으로 남쪽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이다. 형태는 부정형의 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성 내부면적은 약 128,890이다. 성벽의 안쪽에는 5m 정도의 회곽도(廻郭道)를 두어 병사들의 이동이 용이하도록 하였으며, 성벽은 자연지형을 따라 굴곡을 이루도록 쌓았다. 성이 급격히 회절(回折)하는 부분에는 별도의 치()를 설치하였는데, 치의 길이보다 너비가 넓게 축조하였다. 성에는 북쪽·서남쪽·동쪽·남쪽에 문터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이 중 남문이 정문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미 조사된 동문터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懸門式)의 구조이며 문터의 바닥에는 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이성산성은 2차에 걸쳐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차 성벽과 옥수수알 모양의 성돌을 사용하여 쌓은 2차 성벽이 남아 있어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쌓여졌음을 알 수 있다. 1차 성벽은 기단석(맨 아래의 받침돌)의 높이와 안쪽 벽의 남은 상태를 고려할 때 약 6.5m 정도의 높이에 폭은 대략 7.5~9.5m가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돌은 대충 다듬은 정도이고, 크기는 대략 20~35정도인데 남쪽 성벽에서는 길이가 44나 되는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남벽은 기단석 없이 암반 위에 바로 수직의 성벽을 쌓았고 동벽은 75×60크기의 기단석을 1~2단 정도 놓고 그 위에 성벽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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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성벽은 가로 70·세로 50·높이 27정도의 기단석 위에 크기 28×37의 옥수수알 모양 성돌을 들여쌓아 만든 것이다. 남벽의 경우 현재 10단까지 성돌이 남아 있는데 높이가 대략 7~8m 정도로 추정된다. 1차 성벽은 경사도가 6~7°로 거의 수직에 가깝고 2차 성벽은 들여쌓기를 하여 대략 21°의 경사가 져 있다. 1차 성벽과 2차 성벽은 약 3.8m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2차 성벽의 뒷채움돌이 가득히 쌓여있다. 이성산성의 내벽을 쌓는 방법은 우선 지형이 낮은 부분은 성벽의 안팎을 수직에 가깝게 쌓는 내외협축법(內外夾築法)으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것이 일반적이며, 산등선을 지나는 지형이 높은 부분에는 암반을 파내고 성돌을 암반에 기대어 쌓아올리는 편축법(偏築法)을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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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체로 6~8세기경의 신라시대 토기류와 기와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벼루도 여러 점이 출토되었다. 저수지내에서는 철제도끼와 쇠스랑, 짚신, 목제인형, 바구니, 팽이 등 다양한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고, 특히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요고와 다량의 목간(木簡)은 당시 사회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출토유물 중 목간에서 명문이 확인되었고, 내용은 무진년 정월 12월에 어떠한 모임이 있었고 거기에 참석한 도사(道使)와 촌주(村主)등의 지방관과 지방 유력세력의 직명을 나열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어 7세기 지방통치 체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무진(戊辰)608년이나 668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대관 사적 제2(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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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부에 올라가면 하남시 전체와 멀리 한강 이북을 조망할 수 있다

 

이성산성은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성산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배후의 평야지역을 방어하고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춘궁동에 위치한 이성산성의 총 둘레는 1,665m이고 내부의 면적은 약 128,890로서 약 47천여평 정도이며 해발 209.8m인 토산이며, 성벽의 높이는 3~7m로서 남으로는 청량산 줄기인 금암산 줄기에 자리하고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해발 209.8m의 이성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감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동쪽은 숭산인 검단산이 있고 남쪽은 남한산, 서쪽과 북쪽은 한강이 흐르고 있으며 서울 광장동의 아차산 서편에 이르기까지 한강유역에 위치해 있어서 남한산성, 검단산성, 아차산성, 대모산성, 대모산토성, 우면산성, 옥녀봉토성, 삼성동토성 등의 성을 조망하며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축조 후 200300년가량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넓은 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북쪽의 적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은 충분히 발휘했다고 볼 수 있으나 산성이 축조된 시기와 축성의 목적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문헌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학자 정약용과 중정남한지를 쓴 홍경모, 대동지지를 쓴 김정호는 모두 백제의 성이 하남에 있으며, 왕성 또한 고골의 궁안 마을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까지 춘궁동 일대에 백제의 왕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으며, 이후 일제 시대의 사학자인 금서룡(今西龍)은 춘궁리 일대를 백제의 도읍지로 보고 이성산성을 삼국사기개로왕조의 북성(北城)으로, 남한산성을 남성(南城)으로 보았다. 이병도 박사 또한 하남위례성을 춘궁동 일대로 보았으며, 잠시 천도하는 한산을 남한산 일대로 보았다. .

그러나 한양대 박물관에서 1986년부터 2006년까지 20년 동안 총 12차례에 걸쳐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성 내부시설로는 저수지 3기와 건물지 10, 문지, 배수구 등의 부대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로는 토기, 목제인물상,목간,,요고,,팽이등과 용척(건물을 질때 사용하는 자)두개(고구려척 35.6cm, 당척은 29.8cm, 고한척26.7cm), 철촉,청동방울,따비,쇠스랑,도끼등이 발굴되었으며, 석제는 반달칼,간돌칼,석촉,돌거울,활석,숫돌,어망추등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하며, 발굴된 유물의 상당수가 신라가 한산주를 설치한 이후의 것들 이라고 발굴기관은 추정하고 있어, 이성산성을 한성백제시대 축성한 성으로 보고 있는 학자들과 의견이 분분한 채 그 정체성이 모호한 상태이다.

 

성내에는 평면적이 80평이 넘는 대형 장방형 건물을 4개소를 포함하여 8, 9, 12각 건물지 등 대규모 건물지가 상당수 노출되었다. 그 중 동서로 대칭을 이루는 E지구의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으로, 8각 건물은 토지신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되어 주목을 받고 있으며,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18개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다각형 건물 중 반수 이상이 이성산성에 있어 그 쓰임과 시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

이성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체로 굽이 낮은 고배류와 항아리, 인화문토기 등 경질의 기와가 대부분이다. 그 외에도 수십여 점의 벼루와 목간이 출토 되었는데, 목간(木簡)중에는 남한성(南漢城)”이라는 성의 명칭이 확인되어 이성산성이 남한성 또는 한성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 보다 연구가 필요한 유적이다.총길이 1,925m인 이성산성과 성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한양대학교박물관의 주관으로 지난 '86년부터 '99년간 7차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삼국시대 건물지(8, 9, 장방형 등)와 부대시설(문지, 배수구 등), 목간, 철제마 등 총 3,35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3차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목간 전면의 명문기록무진년정월십이일 붕남한성도사< 戊辰年正月十二日 朋南漢城道使...>"무진년"603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토기들은 황룡사, 안압지 출토 토기들과 유사하여 통일신라토기로 판명되며, 신라가 5세기[4] 중엽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축조된 것으로 역사상·학술상으로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산성 안의 건물은 각각 영조척(營造尺)을 달리하였다. 곧 네모난 건물터는 고구려척을 사용하였고, 다각형 건물터는 당척을 이용하였다. 이로써 보아 건물을 세울 당시에는 고구려척에서 당척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C지구 저수지에서는 길이 29.8인 나무로 만든 당척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한편 문살무늬[格子文], 선조무늬[線條文], 민무늬[無文], 생선뼈무늬[魚骨文] 암키와와 수키와가 출토되어, 산성 안에는 위상이 높은 대형 건물이 많이 자리하였음을 알려 준다.한편 흙으로 만든 벼루 40여 점, ‘무진년(戊辰年)’, ‘남한성(南漢城)’, ‘수성(須城)’, ‘도사(道使)’, ‘촌주(村主)’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목간이 다수 출토되었다. 목간은 이성산성의 이름이 남한성이었을 가능성과 함께 축성 시기, 신라의 지방지배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물로 알려져 있다.화살촉과 투부(鬪斧) 등의 철제 무기류와 쇠스랑, , 주조(鑄造) 괭이, 자귀, 낫 등의 농·공구류도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중반 이후로 편년되는 신라 계통의 무기와 농공구들이다. 또한 대형 시루, 동이류, 자배기류, 대형 항아리나 옹·단지류 합()과 뚜껑, 사발, 굽다리접시, 나무빗, 동물뼈 빗치개, 나무 얼레빗, 요고(腰鼓), 나무팽이, 박바가지, 나무 이남박, 칠기, 나무 인형, 나무 망치, 짚신, 버들고리, 천 조각 등 다양한 토기들과 나무 제품들도 출토되었다. 이것 역시 6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 유물로, 당시의 생활과 예술, 풍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하남 이성산성(河南二聖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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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터만이 남아 존재하지만 당시의 건축기술을 상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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