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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의 ‘조선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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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신라와 조선시대 호암산성을 가다2022-05-2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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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성

지정번호;사적 343/시대 ;통일신라

소재지;서울시 금천구 신흥동 산 93-2번지등

 

금천구의 주산인 호암산(347m) 정상을 둘러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 1.547m면적 133.7m2이며 6세기 후반에 7세기 초반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건축하여 군사적 전략 거점 및 행정치소(기관)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서측에서 보면 소래와 남양만까지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북쪽으로 한강을 건너 용산과 남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지리적 조건으로 육로와 해로를 방어하고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서해 연안과 한강수로 내륙 교통로의 중간 지점인 한강 이남 중심에 있어 삼국시대 양천거상행주산성‘ ’오두산성을 잇는 거점 성곽이었으며 당시 한강 유역의 18개 신라 산성 가운데 북한산성,남한산성. 이성산성들에 이어 네 번째로 길었다.

고려시대에는 한강 수로를 통한 중국 무역의 경유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면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군대가 주둔했다고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서남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이다. 축조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을 채우는 내탁법을 사용했다.

현재 동벽의 북쪽 성벽이 잘 드러나 있으며 원형을 포함해 남아 있는 성벽은 1,016m이다.

산성내의 시설로는 한우물(1우물지)과 제2우물지,건물지(),석구상이 있으며 많은 기와와 청동숟가락,철재제 원형도끼,회령원보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산성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자 했던 삼국의 쟁패 및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고자 했던 신라군사의 활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군사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1989년과 1990년 두 차례에 걸쳐 산성과 한우물(천정[天井] 또는 용추[龍湫]라고도 불림) 등에 대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후 한우물은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곳은 근래까지 조선왕조의 도읍설화와 관련된, 이른바 해태상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산성 유적의 동북쪽 끝에 그 짐승을 형상화한 석상이 있다. 이 석상은 한우물의 각자(刻字)로 보아 석구(石狗)로 추정된다.

산성은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고 있으며,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다. 산성의 동북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험준한 봉우리들로 막혀 있으며, 서북·서남·서쪽은 안양천(安養川)을 끼고 발달한 넓은 평지를 이룬다.

 

이러한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안양과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암산성을 중심으로 한강 남북 일대에는 많은 산성과 토성이 있는데, 이들의 축조 시기는 서로 약간씩 다르더라도 삼국통일기에 들어서면서 각 지역을 방어하는 주요 관방시설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실제로 발굴 조사된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산성(二聖山城) 유적과 비슷한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어 확실한 신라성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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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성의 평면형태는 남북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성벽의 총 연장은 약 1.25이고 성벽은 표고 325m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산성터 안에서 확인된 유구는 우물터 2개소와 건물터 4개소이다. 발굴된 두 우물터는 호암산성이 처음 축조되었을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이 출토되어 성의 축조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기존의 한우물인 제1우물터는 최근까지 조선시대에 쌓아올린 석축이 남아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지(石築址)가 확인되었다. 연못터의 내부 퇴적토 조사에서 나타난 층위(層位)에 따르면, 지표 아래 30까지는 백자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그 아래에는 유물이 거의 없는 굵은 모래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모래층은 연못이 사용되지 않던 시기에 토사가 유입되어 형성된 것이다. 또 이 모래층 아래에 교란되지 않은 뻘층이 계속되고 여기에서는 통일신라의 유물만 출토되었다. 그 아래에는 유물층이 없고 자연 암반 위에 점성(粘性)이 강한 점토(粘土)가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목제 손잡이에 철제날이 끼워진 월형도끼와 토기 등 통일신라시대 유물의 중심연대는 대개 78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2우물터에서는 仍伐內力只乃末(잉벌내역지내말)’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숟가락이 출토되었다. 원래 금천 일대는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당시의 지명은 전하지 않고 한강 유역이 고구려에 편입되었을 때 잉벌노현(仍伐奴縣),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곡양현(穀壤縣)으로 불렸다.

그런데 명문 중 잉벌내의 ()’는 나(() 등과 같이 지명 끝에 붙어 때에 따라 훈독 또는 음독되는 것으로, () 또는 천()이나 천변의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잉벌노와 잉벌내는 동일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문의 역지는 인명이고, ‘내말은 신라 17관등명 가운데 11위인 나마(奈麻)의 별칭으로 금석문에 자주 나오고 있다.

한편 757(경덕왕 16)에 잉벌내현이 속해 있던 한산주가 한주로 개칭되고 그 영현(領縣)으로 1소경과 2746현의 군현 정비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때 토착지명이 한자풍으로 개칭되고 있다.

따라서 명문이 새겨진 유물로 보아 산성의 축조 하한선은 경덕왕 16년이 된다. 호암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미루어 672(문무왕 12)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 남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관련된다.

주장성은 한강에서 경기도 광주지역으로 침입하는 적에 대한 방어와 공격에는 적절한 요새이지만, 지형상 관악산이 가로막혀 서울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적은 방어할 수 없다. 여기서 서해안과 한강 북쪽이 한눈에 조망되는 관방시설이 요구되는데, 그 지역이 바로 호암산성이 된다. 따라서 당시 이 일대에서 당나라 군사와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신라는 호암산성의 입지를 충분히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산성 안 제1우물터의 석축구조가 674년에 만들어진 안압지의 석축구조와 거의 유사하여, 산성의 축조 시기가 문무왕 때로 나당전쟁에 대비한 관방시설로 추정된다. 석축구조는 축조 당시의 원형이 남아 있는 남동쪽 모서리의 경우 모두 13단으로 쌓여 있으며, 석축의 맨 아랫단은 20가량 내어 쌓고 위로 가면서 들여쌓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축조방법은 안압지의 축조방법과 동일한 것이다.

또한 호암산성 발굴에서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중국 화폐인 희령원보(熙寧元寶)가 주목된다. 희령은 북송(北宋) 신종(神宗)의 연호로 1068년에서 1077년까지 사용되었으므로 고려 문종 연간에 해당된다. 이 때는 고려와 송이 활발한 대외무역을 하던 시기로, 당시의 화폐가 호암산성에서 발견됨으로써 고려시대 국제무역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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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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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물

한우물(사적 제343)은 호암산 정상에 있는 길이 22m,12m의 연못으로 네 주변을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큰우물이라고도 불린다. 이 연못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가뭄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고 전시(戰時)에는 군용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큰우물또는 하늘 못(天井)이라는 뜻으로 서울 호암산성 안에 있는 두 개의 연못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 시기에 길이17.8m,13.6m,깊이 2.5m 의 규모로 만들었으며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길이 22m,12m,깊이 1.2m의 규모로 증축하였다.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통일신라시기의 것이며, 19912차 보수정비공사에서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두 식의 연지를 함께 복원하였다. 문무왕때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축고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때에는 선거이(宣居怡)장군이 왜군과 전투를 하면서 이 우물을 군용수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조선시대 건국설화와 관련하여 방화용이라는 설도 있으며 가물때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남벽 상단에서 석구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뒤집힌 채로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용복(龍楅)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심한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고 평상시에는 군용에 대비하였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여기에 돌해태가 있어 수신(水神)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나 돌해태가 아니라 석구(石狗)임이 밝혀졌다. 우물의 사주벽(四周壁)화강암으로 쌓았고 한우물 내부에서는 한국 최초로 철제의 월()이 출토되어 6세기 이후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관련한 통일기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우물터가 있는 호암산에서는 일부 문헌에만 고성(古城)으로 기록되어 전하는 퇴뫼식 산성(총연장 1,250m)의 존재가 밝혀짐에 따라 이 유적지는 학술적으로도 뜻깊은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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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구상(石拘像)

석구상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경기읍지시흥읍지에 있다.

호암(호암)이라는 바위가 현의 진산인 금지산(금주산,지금의 호암산)에 있는데, 그 모양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닮아서 한양으로 도읍을 삼을 때 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바위의 부쪽에 돌로 만든 사자를 묻고 남쪽에는 돌로 만든 개를 묻었다고 전한다.
과거에 해태상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그 형태가 개에 가깝다고 하여 석구상이라고 부른다. 1990년 제 1우물지 발굴조사 당시 조선시대 건축물에서 석구지(石拘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확인되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0.9m 높이 1.0m 가량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우물지 근처에서 개 모양의 동물상(석수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서울에 화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우물 근처에서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 연못이 석수상과 관련되어 석구지라고 불려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호암산성가는길

호압사(虎罨寺)

호압사는 금천구 호암로 278번지에 있는 사찰로서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먼저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위대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그 바위를 범바위(虎巖)랄 부른다. 풍수가들이 이를 보고 바위 붂족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1394(태조 3)을 전후로 해서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밤마다 괴물이 나타나 궁궐을 무너뜨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에 무학대사의 조언을 받아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현재의 터에 사찰을 짓고 한양의 지세를 안정시켰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렇듯 호압사는 조선초 한양을 수도로 정하며 관련된 일로 창건된 것이니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 호암사는 1841(헌종7)에 이르러 중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같은 해 의민(義旻)스님이 쓴 (경기좌도시흥삼성산호압사 법당 현판문)에 상궁 남씨와 유씨의 도움을 받아 법당을 고쳐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호암산성은 호압사에서 시작된다. 일단 호압사까지 왔으니 경내를 둘러보고 호암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시작해본다. 시작하자마자 산길에 깔닥고개를 마주치게 되는데 많은 계단을 보고 겁을 낼 필요는 없다. 금천구에서 고맙게스리 산행이 편하게 거의 정상 인근까지 편안한 계단을 만들어 놓고 있다. 계단이 싫은신분은 옆에 옛길로 산행을 하시면 됩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부터 오직 한 개의 이정표만이 놓여져 있다. 호암산 정상과 호암산성가는길.

호암산성에서 금천구의 전경을 시원스럽게 전망대에서 바라보고 호암산 여기저기의 동물과 요괴를 닮은( 제 생각일 뿐)바위들도 구경하고 기념사진 한커트.
호암산은 친절한 이정표를 보기 힘들어 등산객들에게 물어물어 길을 찾아야 하는데 큰길이 없어 다른길로 가기 일쑤. 일단은 호암산성을 찾기 위해 불영암을 찾아야 한다.

불영암은 해발 310m에 위치하여 벼랑에 자리하고 있어 조망은 최고이다. 법당과 산신각,요사체등 3개동 정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호압사가 인근에 있으니 호압사를 거쳐 이곳에서 기도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불영사가 호암산서의 한우물옆에 위치하고 있어 그당시의 성벽을 이룬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듯 보였다.

지금은 다 허물어져 복원을 기다리며 펜스만 쳐져 있는 것이 아쉬워 보였지만 석구상은 예전 모습 그대로 위치하고 있다. 꽤 넓은 위치에 산성터가 여기저기 놓여 있어 다 보려면 바삐 움직여야 한다. 불영암을 통해 하산하는 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호암폭포도 시원하게 볼 수있고(내가 간 날은 가뭄으로 물이 없어 아쉬웠음) 서울둘레길과 마주치게 된다. 호암늘솔길을 따라 가다보면 잣나무 치유의 길도 있고 여기저기 아카시아 향이 코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길을 따라 가면 출발지인 호압사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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