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리 토성(水石里 土城) 경기도 기념물 94호 주소;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수석리 토성은 통일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흙으로 쌓아 만든 군사유적이다. 전체 둘레가 145M 정도에 지나지 않는 성벽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반달 모양인 이 수석리 토성이 정말로 꼬마 풍납토성에 해당하는 지가 시험대에 오른다. 수설리 토성은 서쪽으로 아차산,남쪽으로 이성산이 보이며, 앞에 한강의 미음 나루가 있어 예부터 교통에 있어 중요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1.5KM 이내에 안산 보루(남양주 다산동),역촌토성(남양주 삼패동)등 규모와 성격이 유사한 유적들이 한강의 미음 나루를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있어서 한강의 조운시설(현물로 받아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서울까지 운반하는 시설)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아 만든 보루 유적으로 보인다. 현재는 개인 선산들이 앞쪽에 놓여져 미음나루와 한강 일대를 보기 힘드나 바로옆 조말생 묘소에만 가도 한강 전체가 환희 보이는 군사적으로 좋은 위치에 놓여져 있다. ‘보루’는 땅의 생긴 모양이나 상태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쌓아 만들어진 둘레 300M 이내의 비교적 작은 방어 시설이다. 수석리 토성은 구릉 정상부의 높은 땅을 깍아 평탄하게 만들고 경사진 부분은 흙을 쌓아 네모꼴의 높은 땅으로 만들었다. 흙을 모아서 쌓아 놓은 것같다고 하여 주민들이 ‘토미재’혹은 ‘퇴미재’라고 불러 왔다. 한강 옆 낮은 구릉지에 자리잡은 수석리토성은 그 지정학적 위치하든가 토성이라는 성벽 구조,그리고 한성백제시대 토기류가 주로 수습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꼬마 풍납토성’으로 거론되곤 합니다. 출토 유물로는 2008년에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토기편과 고려시대 토기 및 기와편이 있다. 서원을 가만 뇌둘리 없었겠죠? 결국 석실서원은 1868년(고종5)에 서원철폐령으로 헐어서 치워버리고 맙니다. 조말생묘소에서 바라본 한강전경 조말생묘소 양주조씨의 묘역이 되어버린 석실서원 고산자로를 따라 남양주시 수석동을 지나다 보면 석실마을 표지석이 눈에 띕니다. 조선시대 안동김씨 세력으리 온상이었던 석실서원이 있던 곳이지요. 그런데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석실서원이 아니라 조말생 묘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석실서원은 병자호란때의 충신인 김상용과 김상헌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서원입니다.1656녀(효종7)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1663년(현종4) 에 ‘석실(石室)’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지요 이후 석실서원은 서인 노론계의 학자와 관리들을 다수 배출하며 명문 사립학교로 자리 잡게 됩니다. 하지만 고종이 즉위하고 타도 안동김씨를 벼르던 흥선대원군이 집정한 후 서원을 가만 뇌둘리 없었겠죠? 결국 석실서원은 1868년(고종5)에 서원철폐령으로 헐어서 치워버리고 맙니다. 조말생(1370~1447)은 조선 초기 의 문신입니다. 조말생은 1401년에 과거에 응시해 장원급데를 한 이후로 태종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명의 왕의 곁에서나랏일을 돌보았던 인물입니다. 특히나 태종의 파벌이었던 조말생은 세종의 정치적인 스승이었으며,두 부자 사이를 조율하고 상황을 주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실하게 지켜낸 현명하고도 능수능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뇌물수수로 인해 재산을 축적했다가 결국 귀양을 가게 되는 모습에서는 조말생이 그저 어질고 현명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수형에 해당되는그 죄 값을 많은 신하들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그저 귀양을 가게끔 한 세종의 결정은 조말생이 나라와 조정에 있어서 얼마난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세종 즉위후에는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해서는 여진족 방어에 힘썼지요. 그런데 조선전기 인물의 묘가 왜 석실서원터에 있을까요? 그렇지요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조말생의 묘는 원래 금곡동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들어섰기 때문이지요. 조말생의 묘가 이장된 후 석실마을은 양주 조씨의 묘역이 조성되고 재실인 영모재가 들어서면서 마을의 정체성마저 뒤바뀌고 말았지요. 이제 이마을에서 석실서원의 자취가 남아있는 것은 석실서원지 묘지석과 마을이름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