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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의 ‘조선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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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용인 할미산성 답사2022-10-05 10:31
작성자

할미산성(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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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산41

경기도 기념물 제215

옛 설화가 담겨 있고 이름부터가 정겨움이 듬뿍 담겨있는 할미산성을 답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할미산성에 오르는 길은 여러군데 있지만 내가 찾은 곳은 자가운전으로 마성 IC 도로공사에서 올라가는 최단거리를 택했다. 그러나 이번 장미비로 산성으로 오르는 탑방로가 폐쇄되어 눈치를 보고 올라갈까하다가 두 번째 영원교회에서 오른길을 찾기 위해 30여분을 돌아 교회앞에 차를 세우고 답사를 시작했다.

 

산언덕을 조금 오르니 등산코스가 적혀진 이정표가 나왔고 산을 오르니 때마침 가을이라 산에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들이 주위에 깔려 있어 유혹을 넘기지 못하고 허리굽혀 튼실한 놈들을 골라 가방에 넣고 오르는데 보통 산에 걸려 있는 코스표식도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감을 못찾고 있는데 때마침 밤을 굽는 동네분이 있어 물으니 길을 가르쳐 주셨다.

그곳부터 할미산성까지는 한시간도 안되는 짧은 거리이지만 처음 맞닥드린 길을 경사가 급한 테크 층계였다. 한두번을 쉬어가야만 하는 힘든 급경사 길이었다. 여기서부터 석정산과 석성산을 잇는 석정교까지는 328 계단을 올라야 하고 석성교에서 할미산성까지의 계단은 87개를 넘어야 했다. 중간에 마성 IC에서 오르는 길이 폐쇄 안내판이 보여 아쉬웠다. 처음부터 이길을 택했으면 편안하게 답사를 마칠 수 있었는데....

 

옛 설화의 마고 할머니의 전설이 담겨 있는 할미산성은 용인 기흥구 동백동과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와 마성리에 걸쳐 있는 할미산(해발 350m)에 할미산성 잔재가 남아 있다. 할미산성이라는 이름이 특이해서 찾아보니 마고 할머니는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은 것이 할미산성이라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런 전설 속에 할미산성이 있는 석성산 일대가 신령이 깃든 토속신앙의 중심지 구실을 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예가 동제(마을을 지켜주는 동신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기원하는 마을 최대의 제례 행사)가 전승되던 마을이라는 점이다. 마성 마가실, 포곡면 가마실, 둔전, 구성읍 동백리, 초당곡 등 근래까지 동제가 행해지는 마을은 어김없이 석성산과 할미산성이 중심이 됐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할미산성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두 개의 산을 잇는 석성교는 다리 중간에 아래가 훤히 보이는 투명 유리가 설치돼 있어 묘한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고 오른쪽에는 6.25.전쟁 터키 참전비가 우뚝 서있었고, 6.25당시 이지역에서 터키 참전용사들의 전투가 있었던 것 같았다.이석성교는 마성 IC에서 바로 보인다. 다리를 건너니 휴식을 전망을 위해 그네도 설치되어 있어 가파른 층계를 올라온 등산객들의 안식처가 된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때라 산에 단풍은 이르지만 상쾌한 산 내음을 맡으며 가벼운 산책으로 할미산성을 향해 가는 수도권에서 운동하며 힐링할 수 있는 몇 안 돼는 관광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미산성을 답사하며 느낀점은 시민들이 많이 찾을 멋진 관광지를 좀더 세세히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쉬었다. 이정표나 안내문이 많지 않아 길을 잃을 염려도 있다. 산성자체의 정보도 그리 많지 않아 장소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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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정리되어 있는 모습의 남문지



산성의 입구는 남문지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돌로 쌓은 산성 흔적이 남아 있고 문지는 복원되어 반듯한 성벽으로 되어있었다. 오른쪽으로 동쪽 성벽도 돌이 쌓여져 있어 성벽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산성으로 알고 올라왔는데 남쪽에서 보는 선장산의 할미산성의 규모는 꽤 커보였다. 가운데 부분은 잡초로 뒤덮혀 오르기 힘들어 동쪽 성벽을 이용해 정상쪽을 향하니 건물지와 집수시설이 있었다.

할미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용인 일대의 전경과 석정산의 모습은 때마침 가을하늘과 함께 잘 어울려 멋진 풍광을 자아냈다. 살랑이는 바람이 등산하며 흘린 땀을 식혀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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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형 건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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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유리로 조성된 석성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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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수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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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지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평평한 땅이 아닌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성이 많다. 할미산성은 높은데 경사면도 가파른 곳에 있어 어떻게 돌을 운반해 성을 완성했는지 궁금했다. 의외인 곳에 성이 자리 잡고 있으니 노파가 하룻밤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대대로 내려온 것 같다. 1998년 할미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된 가운데, 이를 통해 6세기 중엽 신라에서 만들어 한시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06년 경기도 기념물 제215호로 지정된 할미산성은 돌을 이용해 쌓은 성으로 성벽의 전체 둘레는 651m에 이른다

할미산성은 축성법의 특징과 성내부의 각종 유물 등을 봤을 때 신라가 용인지역에 설치한 구성현(駒城縣)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할미산성의 원 명칭은 구성이었을 것이다. 할미산성은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 신라 축성 기술의 변화 과정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기도 하다.이를 통해 신라의 축성법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할미산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 확인된 축성방식은 편축법이다. 곧게 오려 축조한 자연석 외축과 그 안쪽으로 잔돌을 다져 넣고 마지막 안쪽 마무리는 산의 자연지형을 의지함으로써 튼튼하게 유지토록 했다. 돌의 두께는 20~30cm이며 폭은 30~70cm 정도로 다양하다. 성의 내부 남쪽은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고 여기서 몇 점의 토기편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성의 축성 목적은 대중국 교역항이 있는 당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확보를 위해 쌓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견해다.  

성벽은 남문지만 복원이 되어 있고 나머지 성벽은 거의 무너진 상태지만 온전한 할미산성의 높이는 약 4m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이 성을 쌓기 위해 돌을 깨부수어 규격화하는 작업부터 일일이 짊어들고 산을 올랐을 당시 사람들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인부 한 사람이 등짐이나 지게로 운반했을 텐데 수 천 번은 왔다 갔다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무거운 돌을 들고 가파른 산길을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지금처럼 무너질 직전의 할미산성을 제대로 복원되어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후대에 길이 남겨야 할 것이다.


문화재 설명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과 포곡읍 가실리와 마성리의 경계에 있다. 할미산의 북쪽 봉우리와 남쪽의 경사면을 감싸며 축조되었으며,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이다. 성벽의 둘레는 661m로 서울·경기지역의 삼국시대 성곽 중에서는 소규모에 속한다.

할미산성의 성돌은 대부분 인근 지역의 기반암인 우백질편마암이다. 성벽은 벽돌처럼 장방형으로 가공한 성돌로 줄을 맞추어 바른층쌓기를 했다. 내벽과 외벽, 적심부를 모두 돌로 쌓았다. 외벽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덧대어 쌓은 보축성벽도 확인된다. 성문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현문식 성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서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세웠던 망루와 집수시설, 병사들의 숙소로 사용된 수혈 건물지와 땅에 구덩이를 파서 만든 다수의 저장시설이 확인되었다. 특히 산성의 위계를 보여주는 장방형 건물지 3기와 8각초석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할미산성 초석 건물에는 기와가 사용되지 않았다. 할미산성은 출토되는 유물과 축성법의 특징으로 볼 때 신라가 쌓은 성으로 보인다. 신라는 553, 고구려를 몰아내고 백제가 다시 차지했던 경기도지역 일대를 장악했다. 할미산성은 신라의 이러한 한강 유역 진출 과정을 입증하고 있다.

할미산성은 신라가 용인지역에 설치한 구성현(駒城縣)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할미산성의 원 명칭은 구성이었을 것이다. 할미산성은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 신라 축성 기술의 변화 과정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기도 하다.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국가 문화 유산 포탈중에서>

 

 

할미산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투에 유리한 산을 이용하여 쌓은 성을 말한다. 용인 할미산성은 경안천,탄천,신갈천등 하천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석성산을 사이에 두고 고갯길(작고개,백현)이 형성되어 있어 동서 방향의 교통로까지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성을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툰 삼국시대에 신라인이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7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성 내부에서물을 저장하는 집수시설,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팔각형 건물지,적이 침입해 오는 것을 살피기 위한 망루시설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굴다리토기,화살촉,갑옷조각등 천여점이 출토되었다.

용인 할미산성은 산성 내 다양한 시설이 남아 있고 신라 산성의 축성법 건축기법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사용시기(6세기중반~7세기 중반)와 사용주체(신라)가 명확하여 한강유역 신라 산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할미산성 서쪽 성벽

할미산성의 전체 둘레는 661M이고 평명형태는 남북으로 긴 장타원형이다. 전체적으로 외벽은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자 모양의 바른층 쌓기하였다.

20153차 발굴조사에서 성벽 축조방식을 확인하기 위해 서쪽 성벽 구간 일부를 해체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성벽은 암반 위에 바로 축조하였는데, 등고선을 따라 암반을 4단의 계단 모양으로 굴착하여 조성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층단식 기저부 조성 방식은 지금까지 다른 신라성 조사에슨 밝혀내지 못한 공법으로 당시 할미산성을 쌓았던 신라 장인들의 수준 높은 기술력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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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방형 건물지

장방형 건물지는 집수시설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2동 배치하였으며 모두 20153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됐다. 전체적으로 집수시설과 장방형 건물을 짓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북쪽 경사면은 자 형으로 파고 ,남쪽 아래 경사면은 흙과 돌을 쌓아 대규모 축재를 조성하여 평탄지를 만들었다.

1호 장방현 건물지는 집수시설 서쪽에 위치하며 5.3M X 8.9M 규모롤 정면 5, 측면 3칸의 형태이다. 2호 장방현 건물지는 집수시설 동쪽에 위치하며 5.3M X 5.3M 규모의 정명 3,측면 2칸 건물과 5.3M X 6.4M 규모의 정면 4,측면 3칸 등 2개의 건물이 서로 맞닿은 형태이다. 건물지 바깥을 따라 배수로와 울타리를 세웠던 기둥구멍이 남아 있고,배수로로 흘러드는 물이 자연스럽게 건물지 가운데 집수시설로 흘러 들어가도록 조성되었다.

장방형 건물지는 집수시설과 함게 계획적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건물 구조와 배수시설로 볼 때 무기 또는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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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집수시설

집수란 물이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으로 모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할미산서에서 집수시설은 총 2개가 확인되었는데 1호 집수시설은 정상부에 있고 이 집수시설은 20153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되 2호 집수시설이다.

2호 집수시설은 지반을 네모난 형태로 파낸 뒤 바닥과 벽면에 점토를 두껍게 바르고 석재를 덧대어 이용하였다. 지표수와 좌우 장방형 건물의 배수로에서 흘러드는 물을 모아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햇다. 2호 집수시설의 규모는 8.7m X7.4M로 최대 담수량은 10톤 정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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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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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할머니 설화

한국에서 또다른 홍천 고미산 에는 한걸음에 산과 산사이를 뛰어넘는 마고 할머니의 전설이 전한다. 홍천 뿐만아니라 한국 전지역 산에 펼쳐있다. 산과 계곡을 짓고 물길을 텃고 거대한 산성을 쌓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고 할미, 노고 할미라고 불리우며 이야기거리로 삼았다.거대한 몸집을 가진 마고 할머니의 전설은

할머니의 의미만은 아니고 한 어머니한 우리말에 크다 많다라는 뜻이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할머니는 생명의 근원인 큰 어머니 대시말해 대모의 성격을 가진 게 아닌가 싶다

백과사전에는 마고할미가 이렇게 정의되고 있다.

마고(麻姑)할미는 한국신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신 또는 창조신, 거인신이다. 마고할망, 마고할미, 마고 할머니, 혹은 마고선녀 등으로도 불린다. 엄밀히 일컫자면 본명은 마고이며 할미는 존칭에 해당한다.

한국 무속에서 창조신 위치에 있는 신이었으나무속의 힘이 약해지고 외래 종교가 거듭 거듭 유입됨에 따라서 위상이 축소될 대로 축소되어현재 시점에서는 그냥 무속 신앙 속 미미한 존재의 여신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한반도 각 지방의 마고 관련 전설이나 마고를 모시는 사당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신 당(神堂)의 일종인 노고당의 할미도 마고할미일 가능성이 있다

 

전승에 따르면 마고할미는 하늘도 땅도 없는 세상에서 잠을 자면서 코를 골다가 하늘을 내려앉게 해서 카오스 상태를 만들고, 깨어나면서 하늘을 밀어서 갈라지게 만들어 해와 달이 생기게 하고, 땅을 긁어서 산과 강을 만들고, 큰 홍수를 막고, 마지막으로 무당에게 자신의 힘을 내려주고 자신은 승천했다고 한다. 이러한 소임은 세계 각지 신화의 거인 신, 특히 중국의 반고나 제주도의 선문대 할망과 유사하다. 물론 스케일은 이쪽이 훨씬 크다. 또한 이름만 다르고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여신들의 사당도 우리나라에서 여럿 찾을 수 있다.

 

마고할미가 거한 산은 지리산, 천태산 등. 거제도에는 마고할미가 쌓은 성이 남아 있다는 전승도 존재한다.

 

할미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무속 등지에서 젊은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사실 우리나라의 신화에서 ~할매(혹은 할미), ~할배는 나이를 기준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찬양하기 위한 느낌(일종의 권위를 주는 호칭에 가깝다)으로 쓰인다. 할배 또는 할미란 말은 지금 쓰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뜻이 아니라 한+아비, +어미, 大父, 大母였다.

 

북한 평양시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에는 마고할미에 대한 전설이 하나 내려온다. 최창조 교수가 남북교류가 활발할 때 북한에 가서 채집한 설화인데, 다음과 같다.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인 인근 마고 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싸움에서 진 마고할미는 도망친 후 박달족과 단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단군이 자신의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마고는 단군에게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단군은 투항한 마고할미와 그 아래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극진히 대접했다.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이 구 빈(九賓)마을이고, 마고가 항복하기 위해 마고 성으로 돌아오면서 넘은 고개를 왕 림(枉臨)고개라고 한다.

조현설 저, <우리신화의 수수께끼>, 한겨레출판

 

마고할미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거나 창조의 과정에서 최후를 맞는다는 계열의 설화도 전해져 오는데, 이를 외래 거대 종교나 아예 무속을 배격한 유교 사상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권위를 갖던 무속 신들의 신격을 격하한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창조한 거인이지만 다리를 놓는 데 실패하고 물에 빠져 익사 했다고 하며, 강원도의 서구할미는 아이들에게 홍역을 옮겨 죽게 하고, 미녀로 둔갑해 남자를 홀리고, 행인들을 습격해서 제물을 뺏는데 나라에서도 이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효심이 지극했던 효자가 나서 서구할미의 머리에 쑥 뜸을 놓자 '효자가 벌을 주는데 받겠다'며 한 다음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에 대해 이러한 격하는 모두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것으로 선문대할망은 다리조차 제대로 놓지 못한 채 물에 빠져 익사 하는 신이 되었고, 서구할미는 창세신의 지위를 완전히 잃고 요괴의 이미지가 덧 씌워졌는데 이는 민간 신앙을 억압한 조선 시대 유교의 이념이 들어가 있으며, 서구할미가 효자에게 퇴치 되는 것은 그 증언이라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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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노고단의 노고할미

노고산에 있는 노고할미는 얼마나 몸집이 큰지 노고산과 불국산에 다리를 걸치고 오줌을 누었는데 문학재 고개에 있는 큰 바위가 오줌발에 깨져나갔어.” 옆에 있던 노인들이 웃으며 한 마디씩 거든다. “노고할미는 순한 할머니여서 사람들한테 해를 끼치지 않는대.” “노고산성도 노고할미가 쌓았다지.”

 

삼척 서구암의 서구할미

강원도 취병산 서쪽 백월산 중턱 바위굴에 서구할미가 살았는데 어린애들을 홍역 같은 병에 걸려 죽게 했다. 요염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해 남자들을 홀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해도 입혔다. 생김새도 산발에 낚시코에, 손톱은 길다랗고 앙상했다.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했는데 효자인 최아무개가 머리에 쑥뜸을 뜨자 효자가 벌을 주니 달게 받겠다고 하면서 며칠만에 죽었다고 한다. 서구할미가 죽어서 바위로 변한 것이 서구암이다

 

 

##용인 할미산성# 할미산성#신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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