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JaQAxUui2vY 용인 고초골 공소
소재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고초골로 15)/원삼성당 설립년월일;1891년 국가 등록문화재 제708호 TIP;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곳 고초골을 1820년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중에 모여들면서 생긴 교우촌이다. 그런데 고종 3년(1866)병인 박해로 이곳에 숨어 살던 천주교인들은 붙잡혀 순교하였고 마을은 불타 없어졌다. 고종 23년(1886) 조선과 프랑스의 ‘조불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이곳에 다시 천주교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고 기도 및 집회 장소로 사용할 공소를 마련하였다. 현재 공소 건물은 1891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인근 문촌리의 안기선 전 천안군수 댁에서 누에를 치는 데 쓰던 건물을 옮겨서 지었다고 한다. 신자수가 증가한 1910년대에 현재와 같은 규모롤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소 건물은 현재도 미사 장소로 이용하고 있고, 주변에는 피정 장소가 조성되어 있다. 이는 근대 천주교가 정착하면서 한옥 건물의 기능과 형태가 변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고초골 공소는 천주교 수원 교구 내 한옥 공소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902년 11월14일 서울 남부지역 사목순방 내용을 적은 “뮈텔주교일기”에서도 공소가 언급되는데 여기서 뮈텔주교는“마지막 산을 넘기 전에 고초골 공소에서 잠시 멈추었다. 여기에서 교우들로부터 국수를 대접받았다. 이 마을 근처에 외교인들이 운영하는 큰 도자기 공장이 있었다. 산을 넘으니 미리내 였다.”고 썼다. 2021년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청년 김대건의 길을 걷다 순례 프로그램중 하나로 고초골공소를 넣어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청년 김대건의 길을 걷다 의 다섯 성지는 1.은이성지. 2골배마실성지 3고초골공소 4손골성지 5.미리내성지 다섯 성지이다. 청년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이 조선에서 청 사목활동을 하던길을 의미하며 김대건 신부가 박해의 위험 속에서 밤마다 조심스럽게 삼덕고개를 걸어 다니며 사목활동을 전개하던 길이다. 이 길은 신부의 발자위가 서려 있는 곳으로 청년 김대건이 사재로서 신자들을 위해 열정을 불태운 길이며 순교 후 신부의 시신을 안장하기 까지의 이장 경로이다. 청년 김대건 길을 걸으며 민족을 사랑했던 김대건 신부의 삷과 열정을 되새길 수 있고 시원하게 흐르는 은이계곡을 시작으로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을 걸으며 일상에 지친 마음 속의 이야기레 귀 기울일 시간을 가질 수 있다 8월말에 순례 간 날은 주위에 널려 있는 밤나무에서 다 익은 밤톨들이 떨어져 하나 둘 줍는 재미가 있었고. 7년전 본당 ME 피정때 찾았던 때와는 다르게 정식으로 교육관이나 피정의 집이라든가 십자가의 길도 잘 조성되어 있었고 대형 예수성심상도 계셔서 피정을 하거나 가을 의 맛을 보기 위해 찾은 탐방객들에게도 좋은 묵상의 장소를 제공한다. 여기저기 밤나무와 대추나무들을 보고 따먹어 보며 가을을 만끽 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인 것 같다. 찾은 날에는 공소 성전에는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일백년이 넘은 공소의 성전의 모습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원삼면 고초골이 연고지인 병인박해 순교자 병인박해 때 순교한 고초골 순교자들의 이름과 숫자는 전해지지 않는다. 고초골 교유촌에 살던 교우 세대 수와 총 인원이 몇 명이었는지도 전해지지 않지만, 한 마을을 형성했다는 점을 생각하고 옛날에는 가족이 많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고초골 순교자들 수가 수십명이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잇다. 다행히 교회의 공식 기록물인 병인치명사적과 치명일기에 고초골 순교자들 중 다섯분에 대하여 다음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박 바르바나(여 17세. 충천 면천출생 용인 고초골 거주 1867.1.10. 서울서 교수형) 박 바르바라는 충청도 명천(현 충남 당진군 면천면 일대)사람이다. 부모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초골로 이사했다. 6남매 가운데 셋째였던 박 바르바라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형제들과 다툼 없이 잘 지내다가 15세의 나이에 혼인했다. 혼인하여서는 남편에게 박대를 받았으나 순명하며 지냈다. 1866년 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에게 같은 고을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졸이 박 바르바라에게 풀어주겠으니 뜻대로 하라고 했으나 마다하고, 오히려 주위 신자에게 “아무쪼록 이번에 여러 교우들과 함께 주님을 위하여 기도” 고 권유했다고 한다. 기쁜 얼굴로 서울로 압송되어 먼저 잡혀 있던 여러 신자들과 함께 1867년 1월10일 에 교수형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신앙선조약전P191,천주교수원교구 2011년(병인치명사적)23권 P2~3(치명일기)105번> 2. 신 안드레아(남.65세 . 충청 덕산출생.용인 고초골 거주 1867년 1.20 서울서 교수형) 신 안드레아는 본래 덕산 개안(충남 예산군 신암면 별리)사람이다. 신 안드레아의 부모는 교리를 듣고 신앙을 실천할 마음으로 온양 성골9충남 아산시 송악면)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부모님의 병으로 인해 가난한 삶을 살았으나 신 안드레아는 처자에게 늘 “주님을 위해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은 주님의 자식 된 보람이며,산 속에 와 가난한 삶을 살며 고생하는 것은 우리의 본분이다” 라며 수십년을 기쁘게 지냈다. 특히 고초골로 이사해 수년 동안을 가난하게 살다가 1866년 박해를 당했다. 포졸들에게 남은 재산을 다빼앗기고 불에 타자, 가족을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다섯 달 동안 죽는 것만 못하게 살며 쫒기다가 마침내 서울에서 온 포졸 10여명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옮겨 졌다. 서울에서 같이 잡힌 사람이 탈옥하면서 신 안드레아에게 함께 가자고 했으나, 신 안드레아는 “항상 원하던 일이니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더 살다가 죽는 것 보다 좋다” 며 옥에 남았다. 남은 신자들과 함께 1867년 1월20일 65세의 나이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신앙선조약전<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신앙선조>P198,370,431 천주교 수원교구 2011년 (병인치명사적)23권P1 (치명일기)104번 3.유군심 치칠로(남.39세.고초골 출생 1867년 5(음)체포,해미에서 순교) 유군심 치칠로는 본래 고초골 에 살던 사람이다. 신자 집에서 태어나 신앙인으로 성장하여 다른 이를 사랑하는 덕의 모범을 실천하며 살았다. 부모에게 순명하여 내외가 화목하게 지냈으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1866년 박해 때 해미에서 파견 나온 포졸에게 체포되어 옷을 벗긴 채 공주에 매달려 무수히 채찍질을 당하다가 비신자인 양반의 도움으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뜨겁게 주님을 공경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지내다가.1867년 2월 에 포졸을 피해 도망하여 홍주 대전골(충남 당진군 합덕읍 대전리)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5월 모내기철에 일하던중 ,해미 포졸이 동네 이장을 시켜 유군심 치릴로를 체포했다. 유군심 치칠로는 아내와 과부가 된 제수 그리고 조카들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 관원 앞으로 끌려가 12섿 된 유 마태오를 내보내 달라고 사정했다. 그때 풀려난 유 마태오는 삼촌인 유군심 치릴로 부부의 일은 잘 모르고, 자신의 어머니인 유군심의 제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유군심의 제수는 형벌을 당해 팔이 부러졌으나 기쁜 마음으로 옥에 갇혀 지냈으며,묵주 기도를 온 마을을 다해 바치며, 옥졸에게 자신을 빨리 죽이라고 여러번 말했다고 한다. 얼마 후 유군심 치릴로와 그의 아내, 제수는 순교 했다. 당시 유군심 치릴로의 나이는 39세 제수의 나이는 32세였다. 4.유군심 치칠로의 아내(여.고초골 출생 1867년 5(음)체포,해미에서 순교) 5.유군심 치칠로의 제수(여.32세 고초골출생 1867년5(음)체포,해미에서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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