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0824 – 097 / 애그뉴 訪韓 (24일)
韓美 간에 異見을 보인 美軍 减縮문제로 「닉슨」大統領의 特使 「스피로 • T• 애그뉴」 부통령이 방한했다. 朴 大統領은 「애그뉴」 副統領과頂上会淡을 갖고 『北愧의 오산에 의한 戦争도발을 예방할 수 있는 充分한 軍言力이 減軍에 앞서야 된다』는 점을 力説하고 「애그뉴」 副統領은 防衛公約의 誠実한 준수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空港에서 市内로 향하던 「애그뉴」 副統領이 新村로터리에서 환영인파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19710802 – 098 / 사력을 다한 1 포인트 (2일)
한국·일본·브라질이 참가한 3개국 국제여자배구 대회가 열렸다. 한국의 국세청, 동일방직, 일본의 후지필름, 브라질의 파올라스타 팀 등 4개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여유있게 일본과 브라질팀을 눌러 기염을 토했다. 일본 후지필름의 田中선수의 강 스파이크를 사력을 다해 살려내는 동일방직 신영숙 선수.
19710803 – 099 / 움직이는 풀장 (3일)
YMCA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아동용 移動수영장을 만들어 변두리 어린이들의 인기를 끌었다. 길이 7m, 폭 3m, 높이 1.7m의 철제 박스에 물을 채운 이 수영장은 차에 달고 다니며 한 번에 20〜30명씩 수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콜레라」 • 大腸菌으로 수영장이 폐쇄됐을 때는 큰 구실을 하기도 했다.
19710804 – 100 / 酷使에 지친 버스 (4일)
정비불량 버스가 乗客 54명을 싣고 清州에서 報恩으로 가다가 米院面 米院里에서 급「커브」를 돌다 높이 4m의 강물로 추락, 5명이 死亡하고 3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버스에는 野營가던 4H 구락부 회원들도 탔었는데 자신의 부상을 무를쓰고 신속한 구조활동을 별여 사망자를 줄였다.
19710806 – 101 / 快癒를 비는 사인 (6일)
丁一權 国務總理 내외의 초청으로 来韓한 「트란 •티엔 • 키엠」 越南首相의 부인이 首都 陸軍 병원을 訪問, 越南戦에서 부상 당한 患者들을 위문하고 그 기념으로 「기브스」위에다 「사인」을 해주었다.
19710808 – 102 / 振動에 무너진 地下商街 (8일)
仁川市 東仁川驛 구내 地下道 입구에 연결된 地下商街가 부근에 새로 상가를 짓기 위해 基礎를 박는 振動에 무너져 점포주인과 行人통 7명이 壓死하고 24명이 負傷을 했다. 이 건물은 철근기둥을 세우지 않고 「블록」으로 벽을 쌓고 그 위에 「콘크리트 • 슬립」을 올린 날림 건물이었다.
19710808 – 103 / 날림에 깔린 주검 (8일)
길이 10m, 너비 8m 콘크리트 地下 상가가 무너지자 警察과 予備軍은 美軍 重装備의 지원을 받아 구조작업을 벌였다. 이들은 철야 작업을 통해 콘크리트에 깔린 21명을 구출했으나 5명은 이미 숨져 있었다.
19710810 - 104. 더위에 쫓긴 人波 140萬 (10일)
70년도의 기록을 세운 늦더위가 맹위를 멸친 10일, 더위에 몰려 海水浴場을 찾은 사람은 140만명. 釜山 海雲臺만도 35만명이 모여 콩나물 시루를 이루었다. 釜山엔 高速道路의 개통으로 「마이카」族까지 몰려들어 近代化된 「바캉스」를 즐겼다. 이 날의 最高 気温은 光州가 35.1도로 最高, 서울이 33도였다.
19710814 – 105 / 無防備 덮친 콜레라 (14일)
매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 「콜레라」가 올해도 예외없이 찾아들었다. 이 「콜레라」는 昌寧郡 釜谷面 過井里의 喪家집에서 돼지고기를 먹은 門喪客 5백여명 중 1백여명이 앓기 시작, 삽시간에 全國 여러곳에 퍼졌다. 이 「콜레라」는 「오가와」型 「콜레라」로 밝혀졌는데 69년에 침입한 「콜레라」가 越冬 發病한 것으로 보인다.
19710819 – 106 / 變心한 人質劇 (19일)
탈영병이 변심한 애인을 총으로 위협, 인질로 삼고 헌병들과 대치한 사건이 진주에서 발생, 그후 연이어 일어난 인질극의 시초가 됐다. 광주의 제2사관학교에 근무하던 이제윤 일병은 M1소총가 탄환 64발, 대검을 훔쳐 탈영한 후, 진주에 사는 애인 김숙자 양을 납치, 기동대와 대치하다 35시간후 다방에서 잡혔다.
19710819 – 107 / 韓国蹴球 아시아 制覇 (19일)
제13회 「메르데카」盃 쟁탈 蹴球大会에서 韓国팀은 單独 우승, 「아시아」의 頂上을 征服했다. '韓国은 60년에 「말레이시아」와,65년엔 自由中国과, 67년엔 「버마J와 共同優勝을 한 바 있다. 「메르데카」盃를 안고 돌아온 한국팀 선수들이 金浦空港에 도착, 市民들의 환영속에 「카 . 퍼레이드」를 벌였다.
19710821 – 108 / 高速버스의 다이빙 (21일)
밤에 고속도로를 달리던 韓進 高速버스가 秋風嶺 휴게소를 앞두고 運轉 부주의로 42m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 25명이 死亡하고 23명이 重輕傷을 입은 惨事가 발생했다. 京釜高速 개통 후, 최대의 惨事인 이 사고는 運轉士가 근처에 서 있는 立看板의 반사광과 「가드 • 레일」이 없고, 이곳에 있는 성토지를 정류장으로 착각, 핸들을 돌린데 원인이 있는것으로 밝혀졌다.
19710824 – 109 / 統一을 向한 共同関心 (24일)
鴨国統一에 관한 国際会議로는 最初인 轉国 統一問題에 관한 国際学術会議가 열렸다. 外国 学者 24명을 포함 83명의 内外 学者가 참가, 5일 동안 열린 이 회의에서 「韓国統一의 国際的 環境」, 「傳国統一 展望」등 60개의 論文이 발표됐다.
19710828 – 110 / 第4回 独立新聞 기념상 (28일)
義洋 言論 財団이 해마다 有功 言論人에게 주는 제4회 独立新聞 기념상 시상식이 있었다. 国際報道 부문엔 한국일보의 鄭宗植 「파리」 주재 特派員이 장려상을,강원일보의 姜約遠 編輯局長과 全商日報 崔昇鎮 編輯副局長은 지역복지 장려상을 탔다.
19710828 – 111 / 단발령에 수난당한 히피족 (28일)
서울 市警은 타인에게 불안감과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장발족 단속에 나서 하루동안에 677명을 점거 29명을 즉심에 넘기고 나머지는 모두 머리를 짧게 깎은 뒤 訓放했다. 이 날 잡혀온 일부 장발족은 “머리를 기르는 것까지 경찰이 간섭하는 것은 私生活의 침해”라고 대들었으나 결국은 머리를 깎기고 말았다.
19710903 – 112 / 発悪의 最後 (3일)
『무조건 乱暴해지고 싶다』며 江原道 楊口 소라 다방에서 레지 등 4명을 人質로 잡고 소란을 피던 犯人 朴秋秀가 기자들에게 담배를 사달라고 부탁, 담배를 사주자 約束대로 「카빈」 총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피랍 36시간 만에 자기 가슴에 총을 쏘아 자살한 朴이 다방 「카운터」 앞 피바다 속에 누워 있다.
19710905 – 113 / 소방차도 한숨 쉰 고층화재 (5일)
우린라에서 가장높은 3.1로빌딩 26층에서 불이나 내부320평을 불태웠다. 이날 화재 진화를 위해 50m의 고가사다리차 1대등 20여대의 소방차가 동원되었으나 화재현장이 지상 80m나 되는 곳이라서 소방관들ㄹ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물은 지상 31층의 건물이다.
19710904 – 114 / 외국인의 金塊密輸 (4일)
金属탐지기에 반응이 없게끔 위장한 金塊 55kg을 조끼에 감추어 金浦空港에 들어오다 잡힌 独逸人 「후너 바호」 (右)와 「먼터 • 루트바히」가 公判廷에 섰다. 이들은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金塊밀수 조직으로부터 운반비를 받고 금괴를 운반했다고 検察의 公訴사실을 시인했다.
19710805 – 115 / 「검은표범」 유세비오의 妙技 (5일)
「포르투갈」의 名門 「벤피카팀」이 韓國에 원정、青龍·白虎와 接戰을 벌여 1勝 1無의 戰績울 남겼다. 「검은 표범」 「유세비오」가 속해 있는 이 팀은 1次戰인 白虎와의 경기에서 「유세비오」가 活躍、 5대 0으로 이겼으나 青龍과의 2次戰에서 힘과 「테크니크」가 對決、 「벤피카」가 오히려 先取點을 빼앗겼고 後半 5분을 남겨놓고 「페널릭 • 킥」을 얻어 1대 1 無勝負가 되었다.
19710907 – 116 / 심판받는 譚詩 「五賊」 (7일)
譚詩 「五賊」사건에 관련 反共法 위반 혐의로 구속된 4명의 피고들이 公判廷에 섰다. 우로부터 金龍星 「민주전선」 편집인, 金承均 사상계 편집자, 夫踪嚇 前 「思想界」 発行人, 김영일 시인, 이들은 8일 모두 保釋되었다.
19710808 – 117 / 돈을 만드는 사나이 (8일)
商銀 1만원권 偽造保手 사건이 밝혀지자 도주해 버린 主犯 崔永均이 검거되었다. 가짜보수를 1만여장 인쇄해 이 돈으로 승용차도 사고 여자들에게 위조수표를 뿌렸던 崔는 아현동 애인집에 숨어 있다가 애인의 변심으로 도주 23일 만에 구속되었다.
19710911 – 118 / 死刑을 宣告받는 「동생 죽인 오빠」 (11일)
한강 3路 女人殺害事件 선고 공판에서 죽은 鄭仁淑양의 오빠 鄭宗旭 피고는 死刑을 宣告받았다. 裁判部는 『피를 나눈 혈육으로 권총을 발사했을 때 「오빠」라는 절규를 듣고도 계속 1발을 발사했으며 犯行 후, 強盗를 당한 것으로 가장하는 등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권총을 빌려준 申錢定 피고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鄭被吿는 上告審서 감형되었다.
19710915 – 119 / 삼륜차 輪送作戰 (15일)
秋夕을 맞아 省墓客들이 몰리자 약삭빠른 商魂이 고개를 들었다. 弘恩洞에서 碧蹄 公同墓地까지 100원씩 받는 이 삼륜차 合乗도 재빠르지 않으면 타지 못할 정도. 祖上에 孝道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19710918 – 120 / 石手議員 귀국 (18일)
1936년 「베를린 • 올림픽」 紀念碑에 새겨진 孫基繭 선수의 国籍을 JAPAN에서 KOREA로 고쳐놓은 朴永禄 議員 부부가 歸国했다. 朴議員은 끌 • 망치 등을 미리 준비해 가지고 출국, 「베를린」서 부인과 함께 밤을 세워 이 일을 했고, 西独 당국의 체포령까지도 내렸었다. 그러나 그뒤 다시 JAPAN으로 고쳐져 결국은 허사가되고 말았다.
19710828 – 121 / 엘살바도르 大統領 来韓 (28일)
「라틴 아메리카」 国家 元首로서는 처음으로 「피델•산체스•에르난데스」 「엘살바도르」 大統領이 來韓했다. 「산체스」 大統領은 5일간 머무르면서 頂上会談 등을 갖고 양국의 交易增大에 대해 協議했다. 「산체스」 大統領은 49년 초부터 51년 未까지 大尉로 韓国委員団의 「엘살바도르」 代表 로 활약했었다.
19710921 – 122 / 세브란스 자리서 韓末遺物 (21일)
철거 중인 旧 「세브란스」병원 별관 入院室 礎石 밑에서 光武 7년 달력、 常平通寶 등 동전과 皇城新聞(1902년 11월 27일자)、漢城旬報(1902년 11월 26일자)와 1원짜리 日本지폐 1장、 당시 駐韓美國全權公使 「알랜」 씨의 祝辭 등 68년 전의 유물 23종이 발견됐다.
19710929 – 123 / 新民 大統領 候補에 金大中씨 (29일)
金大中 씨가 予想을 뒤엎고 新民黨 大統領 候補로 선출되었다. 柳珍山 黨首가 40代 候補 金泳三씨를 지명했으나 1次投票에서 아무도 過半数의 표를 얻지 못해 2次投票에 들어가 李哲承씨系의 加勢로 金大中 씨가 金泳三 씨를 누르고 候補에 指名됐다. 1次投票서는 金大中씨 382, 金泳三씨 421표였고 2次投票는 金大中씨 458표, 金泳三 씨 410표였다.
19710914 – 124 / 불길에 휠싸인 修學旅行 (14일)
牙山 顯忠祠에 修學旅行을 갔다 돌아오던 京西中學生 77명을 태운 관광버스가 牙山郡 매방면 북수리 이내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하면서 70여m나 밀려나다 불이나 45명이 燒死하고 29명이 重軽傷을 입는 廣事가 일어났다. 이 사고는 차단기가 없는 이 건널목을 운전사가 일단. 정지하지 않고 건너가다 참변을 빚은 것이다.
19711001 – 125 / 自由国防 다짐하는 建軍 22周年 (1일)
建軍 22周年을 기념하는 국군의 날 기념식이 汝矣島 「民族의 広場」에서 베풀어 졌다. 매해 漢江변에서 벌어지던 「에어 쇼」대신 F一5A F4D 등이 參加한 空中分列이 參席한 이들의 눈을 끌었다. 이날 美空軍의 「나는 倉庫」 c一5도 참가했다. 사열을 마친 徒歩부대와 機械化부대는 南大門路와 西小門路에 서 分列式을 가져 国軍의 偉容을 市民에게 선보였다.
19711006 – 126 / 「굳센 体力. 알찬 団結 • 빛나는 前進」 (6일)
힘과 技를 겨루는 民族의 祭典 제51회 全国体育大会가 1만 6,000여명의 임원,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렸다. 이날 入場式에는 3만 5,000명의 관중들이 「스탠드」를 메웠고 연3년째 參加하는 한성여고의 183가지 「카드씩션」은 이채로왔다. 聖火의 最終走者 林鍾禹씨가 菊花로 단장된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다.
19711007 – 127 / 自由의 보금자리 (7일)
1.21 사태때 武装共匿로 남파됐다 自由의 품에 안긴 金新朝씨가 結婚、 自由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梁譯植 서울市長의 주례로 식을 올린 이들은 예물교환에서 신랑 金씨는 비둘기 한쌍을、신부 崔貞和 양은 탁상용 太極旗를 예물로 주었다.
19711007 – 128 / 1m 75cm에 성공 (7일)
男高부 높이뛰기 決勝에서 1m 75cm에 성공한 박상수 선수. 韓國 男高部 기록인 1m 79cm을 깨지는 못했지만 유연한 「폼」은 관중의 박수를 받았다.
19711011 – 129 / 優勝旗 慶北에 (11일)
제51회 国体는 慶北이 서울勢를 누르고 222. 5점으로 2년 만에 다시 優勝, 覇權을 잡았다. 2位 서울은 214점, 3位는 192점의 全南이 차지했다. 4位 釜山, 5位 京畿, 6位 忠南, 7 位 江原,8位 慶南,9位 全北,10位 忠北,11位 在日億胞, 12位 済州.
19711009 – 130 / 「스카이 슛」 (9일)
男高部 「핸드볼」 2回戦에서 맞붙은 嶺南高(慶北)의 安重鎭선수가 清州工高(忠北) 문전에서 멋진 「슛」을 시도, 先取点을 올렸다. 이 경기서 嶺南高는 23대 5의 大差로 이겼다.
19711015 – 131 / 눈물로 얼룩진 졸업장 (15·16일)
毛山에서 人棺된 45명의 유해가 學校에 마련된 임시 빈소에 도착하자 유족들이 몰려와 몸부림치며 통곡하고 있다. 1천여 學友와 교사들의 흐느낌 속에 非命에 간 45명의 合同 葬禮式이 거행된 校庭에서 學校측은 이들에게 譽卒業狀을 수여했다. 이들은 모두 金浦 高麗公園 墓地에 나란히 묻혔다
19711015 – 132 / 봄을 잃은 基地村 (15일)
美軍減縮의 첫 찬바람이 몰아닥친 곳은 部隊 주변의 基地村. 「캠프• 카이저」基地가 페쇄된 雲川基地村은 죽은 동네가 됐다. 한창 때 624명의 위안부가 들끓었고 177개의 접객업소서 3일에 200상자의 麥酒를 소비하던 경기는 「캠프 • 카이저」를 떠나는 마지막 지프와 함께 가버렸다.
19711016 – 133 / 世界 佛教 지도자들 서울에 (16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21個国 250여명의 高僧이 모인 世界 佛教指導者大会가 열렸다. 이 会議에는 越南의 「틱 • 탐 • 차우」, 中国의 白聖법사, 印度의 「지나라타나」스님 등이 參席했는데 이 회의를 끝낸 一行은 佛国寺. 梵魚寺 등을 돌아보았다. (佛国寺에서)
19711017 – 134 / 터널 속에 박살난 修學旅行 (17일)
京西中學生 修學旅行惨事 사흘 만에 인창고교생들이 修學旅行을 가다가 列車의 충돌로 인솔교사 2명、학생 10명 등 14名이 死亡하고 57명이 重軽傷을 입는 修學旅行 惨事가 連發했다. 이 사고는 忘憂里와 原州사이 「열차집중제어장치」 회로에 고장이 나서 原州驛의 진행상황을 모른 채 反對편에서 오던 貨物車를 출발시켰기 때문에 일어났다.
19711017 – 135 / 死別의 歸京길 (17일)
原州駅 남쪽 2km 삼광「터널」에서 77호 열차와 1508 貨物列車가 충돌, 鄭景根 교감과 10명의 学友를 잃은 인창고교생들이 머리를 숙인 채 철길을 걸어 原州駅으로 돌아오고 있다. 사망자들은 学校葬을 치른 후, 京西中学生이 묻힌 金浦 高麗 公園墓地에 묻했다.
19711017 – 136 / 蛮行의 證據物 (17일)
제306次 軍事停戦委 本会議가 열린 자리에서 「유엔」측 首席대표 「헬릭스• M •로저스」 少将은 9일과 12일 北愧의 경비병과 人夫가 합세해서 굵은 못이 박힌 몽둥이로 「유엔」측 경비병에 폭행을 자행한 사건을 증거물을 보이며 따졌다. 「유엔」측은 共同경비구역내에서 양측 무장해제를 주장했다.
19711022 – 137 / 전주농고 「농악」에 大統領赏 (22일)
제11회 全國民浴 藝術鏡演대회에서 全州農高의 「農樂」이 大賞인 大統領상을 수상했다. 全國 15개 市 • 道팀 1,537명이 참가해서 3일간 光州綜合競技場서 별어진 이번 대회의 2位 國務總理賞은 全南의 「보름 줄다리기」、3位 文公長官賞은 京畿의 「農樂」등 4개部門과 개인 6명 이 탔다.
19711025 – 138 / 떠내려가는 (25일)
秋収期에 늦가을 비가 이틀동안 253mm나 내려 다 지어놓은 농사에 7억 8천만원의 피해를 냈다. 瑞山과 牙山지방에 피해가 제일 커 베어 놓았던 벼가 모두 젖거나 떠내려 갔고 떠내려 가던 볏단을 건지려던 農夫 8명이 溺死했다.(서산에서)
19711027 – 139 / 777쌍의 매머드 結婚式 (27일)
10個国에서 모인 統一教会 信徒 1,554명이 모여 장충체육관에서 合同 結婚式을 올렸다. 統一教会 創始者 文鮮明 씨의 主礼로 진행된 이 「매머드」 結婚式은 入場하는데 만도 1시간이 넘어 걸렸고 入場하는 신랑•신부에게 聖水를 뿌려 결혼을 祝賀했다.
19711029 – 140 / 10명의 생명 삼킨 1,500도 (29일)
시운전 중이던 仁川製鉄 제1工場 電気 제선로의 밑바닥이 1m쯤이 터지면서 1,500도의 뜨거은 쇳물 30톤이 쏟아져 나와 부근에서 일하던 공원 6명과 女子 작업부 4명 등 10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호상을 입었다. 이 제선로는 西独 「데마그. 루르기」에서 시공 설치했는데 이 사고는 시운전 중에 일어 난 두번째 사고다.